늘 여행을 떠나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을 정하기도 하지만 저 경우는 수시로 상황에 따른 변경을 자주하는

편이라 고생을 각오해야 하죠~   고질병이라 해야 하나? ㅋㅋ
특히 그날 정해진 일정이 생각보다 다르게 진행을 해야 할 때에는 막연하게 시간을 보낼 곳을

찾기 위한 방황이 주는 어려움과 고민이 우연의 인연을 만들어 주기도 해 무작정 돌아 다니는

수 밖에 없다는 점이 나름의 설래임도 생기더군요? ㅎㅎㅎ 

그런 여행이 되면 나름의 노하우?라 할 수 있는 골목길을 더 찾게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일행이 있다면 불가한 일이지만 혼자만의 자유로움을 아는 저로써는 스스로 여행의 즐거움을

만들어야 하니 변명이라고나 할까요?

낮선곳에서의 잠자리가  불편하다 보니 조금 늦은 일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갈려고 간건 아니데 운현궁과 마주치게 되었네요^^ 조금 이른 시간이라 입장은 불가하고...

입춘대길 건양다경은 언제까지 붙여 놓은 건가요?  늘 궁금했는 데...  찾아 보니

원래 풍습대로 라면 입춘첩은 떼지않고 1년을 그대로 두었다고, 

다음해 입춘첩을 지난해 입춘첩 위에  덧붙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참고하세요^^   근디 귀퉁이는 누가 때어 먹은 건지...

운현궁에 대해 상세하게 알아보고 인증샷을 남겨 봅니다. 아직 시간이 넉넉하니 ㅎㅎㅎ

여유란게 좋은 거죠~  평소라면 스치고 지나칠 풍경도 이렇게 둘러 보게 되니 ㅎㅎㅎ

옛 ‘공간’사옥이 리모델링한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로 바뀌었다고 하는 데  언제 가보나~

유명 드리마에 나온 것 같은 식당 같아 찍어 보았습니다. 문을 열었으면 아침이라도 먹고 갈건데...

알고 보니 엄청 유명한 식당이더군요~ 다음에는 꼭 들러 먹어 봐야겠습니다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감나무가 한옥의 아침과 잘 어울립니다^^

오늘도 파란 하늘만큼 멋진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쌀쌀해진 날씨에 건강 유의하시고
항상 미소와 여유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昌德宮 演慶堂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를 위해 지어었는 데,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쯤에

새로 지은 것입니다.  사대부 살림집처럼 꾸몄으며 왕의 사랑채인 연경당과 서재인 선향재를 비롯하여

120여 칸 규모였습니다.

후원을 둘러 보고 나가는 길에 드른 연경담 돌담길이 더욱 운치가 있네요^^

연경당의 정문인 장락문입니다.  장락문을 지나 장양문에 들어서면 연경당의 마당이죠^^

연경당 사랑채 안마당의 구성은 누마루와 대청, 온돌방으로 구성된 사랑채와 서책을 보관하던 중국풍의

건물인 선향재[善香齋], 그리고 선향재 뒷편 높다란 단을 쌓은 곳에 하엽동자로 난간을 두른 농수정[濃繡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편 연경당 안채는 연경당 사랑채와 담하나를 두고 연결되어 있지만 별도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안채의 뒤편에는 음식을 저장하고 조리를 하던 부엌과 광이 딸린 반빗간이

통벽문과  통해 있습니다.[출처 : 문화배움터]

연경당 옆의 건물은‘향기가 좋다’란 뜻의 선향재[善香齋]입니다. 여기서 좋은 향기란 바로 책의 향기를

말한다고 합니다.  처음 보았을 때는 왠 서양식 건물이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선향재는 그 이름답게 책을

읽고 보관하는 곳인데, 그래서 따로 동판으로 지붕을 내어달아 햇빛을 막고 있습니다.

이 동판 지붕 밑에 정자살로 짜여진 문짝으로 차양을 달고 이를 조절할 수 있게 끈을 달아 놓았으며,
동판 위쪽을 쳐다보면 이 차양을 올리고 내릴 때 쓰는 도르래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차양은 햇살이나 비, 바람을 막아 주는데, 이런 구조가 이미 신라의 황룡사 금당에도 있었음이

황룡사 발굴조사에서 입증되었다고 합니다. [출처 : 인터넷 자료 참조]

안채에서 안방을 들여다보면 사랑채까지 공간이 쭉 이어진 것을 볼 수 있는 데, 한옥의 특징 중에 하나가

‘개방성’입니다. 장지문을 열고 닫는 것으로 방이 생기기도 하고 벽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

개방적인 한옥의 구조인 것을 잘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어디서나 시원스럽게 문들이 다 열려 있어 좋았는 데 기왕 가구들도 배치가 되어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밖에서 보기엔 사랑채와 안채가 내외담을 통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만 안에서는 이렇게 다 통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내외담을 ‘헛담’이라 부르기도 한다네요^^

근디 어느 방에서나 문만 열면 옆방과 마당을 볼 수 있는 구조가 정말 좋게 보이는 데 겨울엔 ㅎㅎㅎ

창문 고리가 인상적이라 담아 보았습니다~

이번 서울 궁궐여행을 이렇게 다양하게 보았지만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한 궁궐들인 창경궁, 경운궁, 경희궁,

종묘, 사직 등을 언젠가 다 둘러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너무나 자랑하고 싶은 우리의 문화유산이라 꼭 찾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지도는 조선 후기에 김정호(金正浩)가 1824~34년에 그려서 목각(木刻)한 서울의 지도목판인

보물 제853호인 수선전도(首善全圖)입니다. [출처 : 궁궐길라잡이]

육각형 형태의 겹지붕을 가진 존덕정인데, 1644년 인조 때 만들어져 이 일대에서는 가장 오래된 정자입니다
처음에는 육면정이라고 불리다가 존덕정으로 바뀌었으며, 본 건물을 먼저 짓고 그 처마에 잇대어 지붕을

만들었다. 바깥지붕을 가는 기둥 3개가 쌍이 되어 바치고 있습니다.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 관람정과 승재정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는 네모난 연못과 둥근 연못이 3개가 연이어 있었지만 관람지는 조선 말 하나의 곡선 모양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언덕 위쪽에 있는 정자는 사모지붕을 한 승재정인데, 관람정 맞은편 있습니다.^^


존덕정[尊德亭]은 본 건물을 짓고 그 처마에 잇대어 지붕을 따로 만들어 지부이 두 개입니다.
바깥 지붕을 받치는 기둥은 하나를 세울 자리에 가는 기둥 세 개를 세워 더욱 이채롭네요~

특이하게도 지붕이 겹으로 되어 있네요~ 항상 아쉬운 점은 시간에 쫓겨 여유를 가지고 유물을 바라보지

못하고 서둘러 구조만 보고 사진을 찍고 발길을 돌리던 것을 이번에도 또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존덕정을 보다 유명하게 만든 것은, 정조가 스스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호를 삼으며 이 정자에 '만천명월 주인옹 자서'라는 글귀를 게판으로 건 것이었다. <홍재전서>에 기록된 자서에 의하면, "만천명월주인옹은 말한다. 달은 하나뿐이고 물의 종류는 일만 개나 되지만, 물이 달빛을 받을 경우 앞 시내에도 달이요, 뒷 시내에도 달이어서 달과 시내의 수가 같게 되므로 시냇물이 일만 개면 달 역시 일만 개가 된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달은 물론 하나뿐인 것이다. 나의 연거 처소에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써서 자호로 삼기로 한 것이다. 때는 무오년(1798, 정조22) 12월 3일이다."라고 하여, 만 개의 개울에 만 개의 달이 비치지만 달은 오직 하늘에 떠 있는 달, 바로 정조 자신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후원의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천장에는 청룡과 황룡의 쌍룡이 그려져 있습니다.

[재대로 담지 못한 사진 2장은 인터넷 이미지로 대처 했습니다.]

단순하게 멋진 정자라 생각하고 마냥 보았지만 해설사가 구조 하나하나에 그 의미가

그렇게 많은 걸 설명듣고 보니 더욱 색다르게 느껴지더군요.

관람전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들

관람정은 평면이 부채꼴 모양으로 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태의 정자로 ‘관람(觀纜)’은 ‘닻줄’,

즉 ‘배 띄움을 구경한다’는 뜻이며  나뭇잎 모양의 녹색 현판에 정자 이름이 적혀 일반 궁궐 건물의 현판과는 그 형태가 다른 재미 있는 모양을 하고 있어 건축적이기보다 공예적인 수법을 많이 구사한 정자로
창덕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하나로 손꼽힙니다.

창덕궁 취규정[聚奎亭]은 후원의 산 등성이에 있습니다. 존덕정 앞 길을 따라 100m 정도 오르면

양갈래 길이 나옵니다. 왼쪽으로 가면 옥류천으로 가는 길이라 하네요~

취한정[翠寒亭] 소요정의 동쪽에 있으며, ‘蒼翠凌寒’(푸른 나무들이 추위를 업신여기다)의 뜻에서 취했다.

옥류천(玉流川) 가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을 한 익공집으로 단청을 하였다.

크기는 3.7평으로 작은 건물이며, 헌종때 궁궐지에 창건연대를 미상이라 하였다.

숙종의 ‘취한정제영의 시’가 있는 것을 보면 취한정은 숙종(1674-1720) 이전의 건물이다.

소요정과 옥류천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태극정[太極亭] - ‘태극이 있은 뒤에야 음양과 오행이 있다는 뜻으로 세상 만물이

모두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뜻으로 지은 정자라 합니다.

청의정[淸漪亭]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인데 궁궐 지붕으로 초가는 이곳이 유일하다고 하네요.

청의정 앞으로는 국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 작은 논이 있는 데 벼가 익어 가고 있더군요^^

농산정 [籠山亭]
정사에 몰두하면 침식을 잃을 정도였다는 정조도 가끔은 후원에 와서 정취를 즐겼다.
특히 농산정을 좋아하여 재숙(齋宿)을 하기도 했으며, 화성 행차 준비를 이곳에서 하기도 하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으로 행차할 준비를 할 때, 창덕궁 후원에서 혜경궁이 타고

갈 가마를 메는 연습 등을 한 후 농산정에서 신하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다.

창덕궁 후원[昌德宮後苑] & 비원[祕苑] 창덕궁 북쪽에 창경궁과 붙어 있는 한국 최대의 궁중 정원입니다.

처음 창덕궁을 찾았을 때는 예약을 해야 하는 지도 모르고 무작정 들어가려고 했지만

이번엔 미리 예약을 해 제대로 구경을 해 볼 참입니다. 12시가 되니 입장이 되더군요^^

사각형 연못인 부용지[芙蓉池]를 중심으로 주합루, 영화당, 부용정[芙蓉亭]이 있는 데,

부용지 중심에 둥근 섬을 만들고 소나무를 심었으며 예전에는 부용지에 배를 띄워놓고 놀았다고 합니다.


芙蓉亭은 숙종33년(1707) 본래 택수재로 지은 것을 정조 16년(1792년 건립?)에 고쳐 지으면서 부용정이라

부르게 돼었으며,  十자형 평면을 기본으로 하되,남쪽으로 양쪽에 한 칸씩 보태 다각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정자입니다. 1795년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에 다녀온 뒤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부용정에서 규장각 신하들과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층 전각인 주합루는 정조가 왕이 되면서 만들었으며, 1층은 규장각으로 왕실 도서관이고, 2층은 주합루로 누마루를 갖춘 열람실 내지 정사를 토론하는 장소로 활용하였다. 서향각은 서고인데 수리중이라 가려져

있네요~  주합루로 오르는 계단 입구에 큰 문 하나, 작은 문 두개로 이루어진 어수문이 있다.

어수문의 뜻은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말로 왕과 신하의 관계를 비유한다고 합니다.

주합루 일대는 학문과 교육을 하던 곳으로 조선 후기의 문예 부흥을 일으킨 곳이라 하네요^^

조선의 궁궐 연못은 천원지방(天圓地方 :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사상에 의해서 조성된 연못입니다.
남쪽 연못 모서리 장대석에 새겨진 뛰어오르는 형상의 물고기가 새겨져 있네요.

부용지 부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영화당[映花堂]

숙종 2년(1692)에 재건한 건물로 왕족의 휴식 공간이자 앞마당에서 과거 최종 시험, 연회, 활쏘기 등

여러가지 행사를 실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며, 이곳에서 많은 행가를 베풀었습니다.

금마문을 지나니 의두합(마루 이름이 기오헌), 오른쪽이 운경거가 보입니다. 할아버지 정조 때의 왕도 정치의 부활을 꿈꾸던 효명세자가 책을 읽던 서재라 합니다. 운경거는 한 칸 반짜리 건물로 창덕궁에서

가장 작은 건물로 마루 밑으로 5개의 구멍이 뚫힌 것이 보입니다. 지금은 단 위로 건물이 개방되어 있지만

예전 모습을 보면 담장과 계단 위에 문이 있었다고합니다.

불로문은 두 개의 주춧돌 위에 한 장의 큰 통돌로 만든 돌문입니다.

불로문을 통과하면 만수무강과 불로장생한다고 한다고 해 절대 만지면 안된다고 당부하네요^^

불로문을 지나면 애련지와 애련정인데, 처음 숙종때에는 네모난 연못 가운데에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고 합니다. 숙종이 연꽃을 좋아하여 애련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지금은 섬은 없고 애련정은 북쪽 끝에 걸쳐 있습니다. 애련정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정자 뒤로 괴석과 산이 병풍 역할을 하고, 앞에는 연꽃이 피고,

북서쪽 연경당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작은 인공 폭포가 되어 떨어진다고 합니다.

이제 애련지를 뒤로 하고 존덕정[尊德亭]과  반월지[反月池] 부근으로 발걸음음을 옯겨 봅니다.

아름다운 고궁에서 전통음악을 특별한 무대 없이 낙선재 전각에서 "낙선재 음악회"를 듣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여인 정희왕후 이야기'를 주제로 배우 임성민씨가 전하는 스토리텔링은 정말 좋았습니다.

공연내 단아한 자세로 임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실제 연예인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정말 미소가 이쁘더군요 ㅎㅎㅎ

고궁에서 우리 음악듣기

궁중무용  "춘앵전"

아쟁산조 - 독주곡으로 창극이나 춤의 반주에도 사용되기도 합니다.

아쟁산조는 그 역사가 40~50년 밖에 되지 않는다. 아쟁은 본래 궁중음악에서 저음역을 담당하던

악기였는데, 창극과 민속무용의 반주에 사용하기 위해 본래 아쟁보다 작게 개량해 만든 것이 소아쟁이며,

아쟁 산조는 소아쟁으로 연주된다. 대략 1950년대에 들어 아쟁산조의 기틀이 확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천재 민속예술가로 손꼽히는 한일섭(韓一燮)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출처 : 국립음악원]

판소리 심청가 심청이가 제수로 팔려 배를 타고 인당수로 가는 대목

<범피중류>는 판소리 다섯마당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대목으로 인식되어 있을 만큼 판소리의

기교적인 음악 어법이 망라되어 있어 심청가의 눈대목으로 꼽히고, 토막소리로 부를 때에

자주 선택되는 대표적인 레퍼토리라 합니다. [출처 : 한국민속문학사전에서]

연예인에 대한 관심이 없어 아나운서라 알고 있었는 데 연기자이기도 했더군요^^

자신의 꿈을 이루어 가는 아름다운 분이라 생각되어 지며, 앞으로 더욱 멋진 연기를 기대 봅니다~

배우 임성민씨 파이팅~~

태평무[太平舞]는 국가의 평안을 위해 추었던 한국 전통 무용인데, 일제 강점기에 한성준이 재구성했다.

대한민국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무속장단에 맞추어 궁중 복식을 갖추고 태평성대를 나타내는 우아하고 화려한 민속춤인데,

의젓하면서 경쾌하고 , 가볍고도 섬세한 발 디딤새가 이 춤의 특징이라 합니다^^

후원을 보기 위해 기다리던 중 시간이 있어 들렀던 낙선재에서

 이런 공연을 본 것 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였습니다.

낙선재[樂善齋]는 1847년에 지어진 건물인데, 본래 이름은 낙선당이었으며, 창경궁에 속해 있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입니다. 2012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5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고종 황제도 이곳에서 지낸 바 있으며,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 황제도 내전 대신 낙선재에

머물렀다. 이곳은 황족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 유명합니다.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여기서 기거하다 숨졌으며, 1963년 고국으로 돌아온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는 각각 1970년과 1989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덕혜옹주 역시 어려운 삶을 보내다 1962년 낙선재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으며, 1989년 사망했습니다.

귀국 후에도 지병으로 많은 고생을 한 덕혜옹주. 그녀가 정신이 맑을 때 썼다는 낙서 한 장은
낙선재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조선황실의 마지막 모습을 잘 대변해 주고 있네요~

"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낙선재는 궁궐 내의 침전건축과는 달리 단청을 하지 않고 사대부주택형식으로 건축되었으나,
궁궐 침전형식이 응용되면서 다른 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문양의 장식이 특히 주목되며,
조선 후기 건축 장인(匠人)들의 축적된 기량을 엿볼 수 있어 건축적인 가치가 높다고합니다.
또한 조선왕가의 실제 침전으로 사용된 역사성도 중요한 건물입니다.

“궁궐지”에서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로 기록되고 있으나 근래에는 창덕궁에서 들어가도록
되어있는 건물로 창덕궁의 동남쪽에 창경궁과 이웃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승정원 일기”와 낙선재 상량문에 헌종 13년(1847)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된 건물로서
국상을 당한 왕 후와 후궁들이 거처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를 뒷 받침하는 예로 낙선재 바깥 뜰에 사각정이 있다.
4면에 亞자분합문 과 고창을 둔 것으로서 관을 발인할 때까지 두던 빈전이다.
일반의정자와는 그 용도가 크게 다른 건물이라 하겠다. [참조 : 궁궐길라잡이]

조선시대 국왕들 중에는 궁궐에서 태어나 세자나 왕자를 지낸 후 국왕에 즉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실제로는 바깥 사저에서 태어나거나 어린시절을 보낸 후 왕위에 오른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국왕들은 어린시절 편안했던 느낌을 되살리기 위해 이궁(離宮)으로 사대부 저택처럼
지은 궁궐을 지었는데, 창덕궁 연경당과 낙선재, 경복궁 건청궁이 대표적이다.

낙선재는 앞면 6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왼쪽에 돌출한 1칸이 초석 위에 놓여 누마루로 되어 있다.

누마루 뒤로는 온돌방 1칸을 두고, 대청2칸, 온돌방 2칸, 다락방 1칸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간소하게 지어졌지만, 문살과 장식등에서 궁궐 전각의 화려함이 남아 있네요^^

공연을 본다고 정신이 팔려 제대로 둘러 보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또 오면되죠 ㅎㅎㅎ

창덕궁[昌德宮]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동쪽으로 창경궁과 맞닿아 있습니다.
1405년 (태종 5년)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이웃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
때에 다시 짓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까지 정궁 역할을 하였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참조 : 창덕궁 홈페이지]

돈화문[敦化門] 보물 383호- 창덕궁 정문  1609년(광해군 원년)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 가장 오래된 문

유네스코 세계유산[World Heritage]은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가 1972년 11월,

제17차 정기총회에서 채택한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지정한 유산을 말한다.
인류문명과 자연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산인 세계유산은 전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하고
이를 후손에게 전수해야 할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 유산이다.

금천교[錦川橋]   보물 : 제1762호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창건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으면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중 가장 오래된 것

궐내각사[闕內各司]는 의사결정기구인 의정부, 집행기관인 육조와 달리 국왕을 보필하는 직속기관입니다.
왕의 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 왕의 칙령과 교서를 작성하고 보하던 예문관, 국왕직속
학술기관인 규장각과 장서 발행을 주관하는 검서청, 왕의 건강을 관리하는 내의원 등이 있었고,
그 뒷편으로 역대 국왕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꾸준히 옛 모습으로 복원되고 있는 궁궐의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습니다^^

소중한 우리의 유산이니 더 잘 보존하고 지켜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조금 아쉬운 점은 이런 궁궐의 내부도 어느 정도 보여주고,  그 속에서 생활하는 모습도 시각적으로

보여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앞으로는 더 좋아지겠죠 ㅎㅎㅎ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로,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는 천장이 높아 통칸으로 트인 1층 건물이다.
인정전은 궁궐에서 으뜸되는 건물로 궁궐의 권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었으므로, 외관이 주는 상징성에 초점이 맞추어 크고 높고 화려하게 지었다.

내부에는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있고, 그 뒤로는 임금이 다스리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가 둘러쳐 있다.  어좌 위에는 보개[寶蓋]라 하여 별도의 천장을 설치하여 어좌의 공간적 차별성을 극대화하였다.  또 인정전의 천장 한가운데는 봉황을 조각하여 이곳이 임금의 공간임을 나타내고 있다.

선정전[宣政殿]은 임금의 일상적인 집무 공간으로 쓰인 곳으로, 인정전 바로 동쪽에서 인정전과 나란히

남향하고 있다. 임금은 여기서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고 학문을 토론하며, 신하나 유생, 종친을 불러

시험을 치르기도 하였으며, 중국과 일본의 사신을 만나기도 하였다. 

또 왕비나 왕족들과 크고 작은 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선정전은 인조 반정 때 불에 탄 뒤 인경궁의 편전인 광정전을 옮겨 지은 전각으로,

지붕은 푸른색 유리 기와를 덮었는데, 궁궐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청기와 지붕입니다.

대조전[大造殿]은 왕비의 생활 공간이자 임금과 왕비의 침전입니다.

인조 때 재건될 당시 45칸 규모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9칸, 측면 4칸인 36칸으로 줄었다고합니다.

대조전 뒤쪽으로는 수라간이 위치해 있으며 안쪽으로는 2층 건물인 장광루(澄光樓)와 경훈각(景薰閣)이 있다

원래 대조전은 지붕이 일자형식이 아닌 솟을지붕 형식이었으며 뒤에 집상전도 있었으나

복원되지 못하였다고 하는 데 앞으로 원형대로 복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궁궐의 굴뚝과 건물과의 조화는 다시 봐도 정말 멋지네요^^

이 구역은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에 화재로 불타 1920년에 새로 지었는 데,
불이 나고 나흘 뒤 이왕직에서는 조선총독부와 협의하여 새 궁전은 "조선식으로 하되 서양식을 참조"하기로
결정하고, 건물을 다시 짓되 경복궁에 있는 여러 전각을 헐어다 짓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원래 이렇게 텅~ 비어있지는 않았을 텐데...  가구라도 있었으면 더 좋겠죠 ㅎㅎ

이번 창덕궁 관람을 통해 궁궐의 다양한 건축 형태와 구조를 상세하게 둘러 볼 수 있어 정말 좋았습니다.

다음 후원(비원)편도 봐 주세요  ^-----^

국립한글박물관 기획전시실에는 한글을 창제해 독자적인 우리 문화의 기틀을 세운

세종대왕을 주제로 한 '세종대왕, 한글문화 시대를 열다'가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업적과 일대기, 세종 시대의 한글문화, 세종 정신 등을 주제로 하며 전통 유물과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정연두·이지원·함경아 등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국립한글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는 한글과 디자인, 공예, 무용 등 다양한 분야와의 융ㆍ복합 가능성을
보여주는 특별 전시와 한글편지, 서체 등 한글박물관의 특화된 콘텐츠를 주제별로 보여주는
전시를 운영합니다. 이와 함께 마련되는 교육체험실, 세계문자실, 한글공방 등의
공간은 어린이, 학생, 다문화가족, 외국인 등이 박물관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체험과 교육의 장으로 활용된다고 하네요^^

[인터넷 정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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