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사 서쪽 산등성이에 누워있는 와불은 누워있는 부처를 말하지만 운주사 와불은 누워있는 게 아니라 일어나지 못한 불이다. 와불은 세분이었다. 한 와불은 홀연히 일어나 와불 절벽 밑에서 머슴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기존의 불상과 탑의 양식을 따를 필요도 없다. 토속적이기도 하고 이국적이며 이색적일 수 있다. 자유분방하고

창조적이기도 하다. 탑에 새긴 무늬나 불상의 옷 무늬, 얼굴모양 모두 파격적으로 만들어도 상관없다.

그 모든 양식이나 격식이 없는 운주사의 석탑과 불상들이 보는이로 하여금 더욱 마음에 평온을 얻게되는 건

우리 모두의 생각이 아닐까?




와불 한구석에서 머슴부처를 떼 낸 흔적이 남아 있어 이 지역의 바위가 잘 떼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현명한 석공은 이 두 와불도 떼어 내어 일으켜 세우려고 했을 게다. 그러나 이 와불은 세우지 못했다.

아직도 와불이 일어나는 날 세상이 바뀌어 천한 백성이 주인 된다는 설화만을 남긴 채 누워있다

운주사의 유물로 가장 과학적이고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칠성바위와 관련한 것이다. 일곱 개의 원반바위는

한여름 초저녁 북두칠성자리를, 위에 있는 와불은 북극성을 나타낸 것이며 바위크기는 북두칠성의 밝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운주사 뒷산 공사바위에 올라가 보니 운주사 전경이 전체적인 모양이 배와 같기도 하다. 계곡이 갑판이고 운주사 맨 앞의 구층석탑이 돛대고 운주사 중심부에 자리한 석조불감이 선실 같기도 하다. 운주사에 흩어져 있는 불상은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 것 같다. 배는 누가 부릴까운주사 후미 높은 곳에 있는 마애불이 아닐까?

운주사 불상들은 천불산 각 골짜기 바위너설 야지에 비로자나부처님(부처님의 빛, 광명)을 주불로 하여 여러 기가 집단적으로 배치되어있다. 크기도 각각 다르고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 단순한 법의 자락이 인상적이다. 민간에서는 할아버지부처, 할머니부처, 남편부처,

아내부처, 아들부처, 딸부처, 아기부처라고 불러오기도 했는데 마치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하다.

이러한 불상배치와 불상제작기법은 다른 곳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 볼 수 없는

운주사 불상만이 갖는 특별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석탑들은 모두 다른 모양으로 각각 다양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연꽃무늬가 밑에 새겨진 넙쩍하고 둥근 옥개석(지붕돌)의 석탑과 동그란 발우형 석탑,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을 닮은 백제계 석탑, 감포 감은사지 석탑을 닮은 신라계 석탑, 분황사지 전탑(벽돌탑) 양식을 닮은 모전계열 신라식 석탑이 탑신석의 특이한 마름모꼴 교차문양과 함께 두루 나타나고 있다.

탑들의 재료로 쓰인 돌은 석질이 잘 바스라져서 오히려 화강암질의 강한 대리석보다 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불모(석공)님이 아니면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하 하니 그 석질로 빚어 만든 탑이 이렇게 수많은

세월의 풍상을 버티어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이곳의 조형자들의 기술이 가히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운주사 석탑들은 우리가 흔히 보아온 석탑들이 아니다. 우선 모양에서 호리호리한 것에서 둥글고 동그란 것까지 다양하다. 거기에 새긴 무늬도 마름모 모양(), 교차문(), 쌍교차문(XX), 수직문(),브이()모양까지 여러

가지다. 모두 정형적인 모양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것들이다.

골짜기 가운데에 있는 원형석탑이 발길을 붙잡는다. 호떡 같이 보인다하여 '호떡탑'이라 불린다. 지붕돌과 몸돌 모두 원형으로 하나의 우주를 상징하는 듯하다. 석조불감과 함께 운주사 중심부를 형성한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석탑과 불상들이 운주사를 더욱 찾고 싶은 곳으로 알려진 것은 아닐까?

그 오랜 세월의 풍파속에서도 오늘날까지 남아 우리들에게 그 무엇을 전하려는 건 아닌지...


천불산 다탑봉 운주사는 천불천탑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불교의 깊은 혼이 서린 운주사는

우리나라의 여느 사찰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불사를 한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무척이나 가보고 싶은 천불천탑의 신비가 가득한 운주사를 찾게 되었습니다.

주변에 산이라 할 수 있는 풍경이 아니라 기종 사찰과 다르다는 생각을 입구부터 하게 되더군요^^

입구부터 웅장한 탑(9층석탑 보물 796호)이 반겨주네요^^

폰으로 찍은 사진이라 화질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볼만은 합니다? ㅎㅎㅎ

대부분의 불상들이 그냥 방치되어 있는 것 같아 보기는 조금 그렇지만 그 또한 세월의 흔적이니...

낙안읍성을 찾게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런 초가가 마을을 이루는 풍경 때문이 아닐까?

왠지 더 포근하고 정겨운 풍경에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겨울 추위에 삭막함도 초가풍경으로 더욱 포근하게 느껴지는 것 같네요^^





옛 정취가 가득한 낙안읍성은 언제 가봐도 포근함이 가득합니다^^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에 위치한 대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본사로 삼재불입지처, 

만세불훼지지로 서산대사의 유언과 의발(가사와 발우)이 전해진 천년 대가람이며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근대이전 에는 대둔사와 대흥사로 불리었다가 

근대 이후 대흥사로 정착되었다.

대흥사는 사적508호 및 명승 66호로 신라 진흥왕 5년(544, 백제성왕 22)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두륜산 대흥사는 조선후기 연담유일이나 초의의순과 같은 저명한 스님등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한 우리나라 31본산의 하나로 조선후기 불교 문화권의 산실이었다.

그리고 초의선사가 40여 년 동안 머물며 다도를 중흥시킨 일지암은 한국 차 문화의 산실이자 

다도의 성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백두산의 영맥이 남으로 뻗어 내린 소백산맥과 지리산을 지나 한반도의 최남단의 두륜산 중턱에 가람이 

자리하며. 해탈문에서 바라보는 두륜산의 형세가 영락없이 부처가 누워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사찰 경내에는 대웅보전, 침계루, 명부전, 응진당, 천불전, 천불상, 서산대사의 호국충정을 모시는 표충사, 

차의 성지로 알려져 있는 일지암, 국보308호 마애여래좌상을 모신 북암(용화전)을 비롯해 성보박물관에서는 탑산사동종(보물88호)등 다양한 유물과 성보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

수년전 방문했을 떄의 분위기는 다른 느낌이였지만 여름 산사의 정겨움은 그대로인 것 같더군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두륜산 대흥사 [頭輪山 大興寺]


연리連理는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서로 합쳐지는 현상인데 두 나무는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햇빛을 향해 바람에 따라 서로 부대끼고 겹쳐져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연인의 사랑에 비유되는 데 일명 사랑 나무라 합니다. 수령 1천년의 느티나무의 뿌리가 합쳐져서  더욱 멋집니다.^^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連理根), 줄기가 겹치면 연리목(連理木), 가지가 하나되면 연리지(連理枝) 

그런데 전남 해남의 두륜산 대흥사 경내의 연리나무는 매우보기 드문 연리근입니다.


땅끝마을은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에 위치한 마을이며, 대한민국 한반도의 최남단이다. 

관광지로 개발되어 땅끝시외버스정류장을 통해서도 방문할 수 있다. 

그리고 섬으로 가는 배를 탈수 있는 땅끝항이 있다.




 땅끝마을에서 갈두산 전망대로 이어지는 곳에 모노레일카가 설치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오를수 있다.

몇년전에는 걸어서 올라갔는 데...  이제는 그 기억 조차 가물가물 하네요~

땅끝마을 갈두산 사자봉 정상에 위치한 땅끝전망대는 우리 국토의 땅끝에 위치해 한반도의 기를 받는 

희망봉이 돼고 있다. 땅끝은 시작과 끝을모두 품고 있어 세계로 향한 출발점이 되고 있다. 

이곳은 남해바다를 가슴에 품고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다. 

또 날이 맑은날은 제주도 한란산이 바라다 보인다. 

전망대를 내려와 바다에서 본 풍경은 꼭 봐야겠죠^^  





해남에는 조선조의 문신(文臣)이자, 국문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고산 윤선도(1587-1671) 선생의 

유적지로 사랑채인 녹우당이 있어 찾게 되었습니다.

600년 전통을 이어온 해남윤씨 어초은파의 종가 고택인 녹우당은 덕음산을 뒤로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자리 중의 하나로도 알려진 곳이다. 

현재 고산유적지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말해주는 은행나무와 비자림, 사랑채인 녹우당, 안채, 행랑채, 

헛간, 안사당, 고산사당, 어초은사당 ,추원당, 고산유물전시관등이 있어 조선시대 양반가 중 가장 많은 

유물 (5,000여 점)을 보관해온 집안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유물과 윤씨집안의 역사를 쉽게 알 수 있는 전시관이더군요^^

너무나 무더운 날 걷기 조차 힘들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둘러 봐야 겠죠~

옛스러움이 아쉽지만 그래도 돌담길이 정겨움을 줍니다.

찾는 사람이 적어 그런지 대문이 꼭 꼭 잠겨져 있어서리... 담장으로만~



비자림숲이 좋다고 하는 데 무더위로 멀리서 보는 걸로 만족해봅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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