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재[樂善齋]는 1847년에 지어진 건물인데, 본래 이름은 낙선당이었으며, 창경궁에 속해 있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입니다. 2012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5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고종 황제도 이곳에서 지낸 바 있으며,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 황제도 내전 대신 낙선재에

머물렀다. 이곳은 황족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 유명합니다.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여기서 기거하다 숨졌으며, 1963년 고국으로 돌아온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는 각각 1970년과 1989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덕혜옹주 역시 어려운 삶을 보내다 1962년 낙선재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으며, 1989년 사망했습니다.

귀국 후에도 지병으로 많은 고생을 한 덕혜옹주. 그녀가 정신이 맑을 때 썼다는 낙서 한 장은
낙선재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조선황실의 마지막 모습을 잘 대변해 주고 있네요~

"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낙선재는 궁궐 내의 침전건축과는 달리 단청을 하지 않고 사대부주택형식으로 건축되었으나,
궁궐 침전형식이 응용되면서 다른 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문양의 장식이 특히 주목되며,
조선 후기 건축 장인(匠人)들의 축적된 기량을 엿볼 수 있어 건축적인 가치가 높다고합니다.
또한 조선왕가의 실제 침전으로 사용된 역사성도 중요한 건물입니다.

“궁궐지”에서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로 기록되고 있으나 근래에는 창덕궁에서 들어가도록
되어있는 건물로 창덕궁의 동남쪽에 창경궁과 이웃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승정원 일기”와 낙선재 상량문에 헌종 13년(1847)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된 건물로서
국상을 당한 왕 후와 후궁들이 거처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를 뒷 받침하는 예로 낙선재 바깥 뜰에 사각정이 있다.
4면에 亞자분합문 과 고창을 둔 것으로서 관을 발인할 때까지 두던 빈전이다.
일반의정자와는 그 용도가 크게 다른 건물이라 하겠다. [참조 : 궁궐길라잡이]

조선시대 국왕들 중에는 궁궐에서 태어나 세자나 왕자를 지낸 후 국왕에 즉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실제로는 바깥 사저에서 태어나거나 어린시절을 보낸 후 왕위에 오른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국왕들은 어린시절 편안했던 느낌을 되살리기 위해 이궁(離宮)으로 사대부 저택처럼
지은 궁궐을 지었는데, 창덕궁 연경당과 낙선재, 경복궁 건청궁이 대표적이다.

낙선재는 앞면 6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왼쪽에 돌출한 1칸이 초석 위에 놓여 누마루로 되어 있다.

누마루 뒤로는 온돌방 1칸을 두고, 대청2칸, 온돌방 2칸, 다락방 1칸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간소하게 지어졌지만, 문살과 장식등에서 궁궐 전각의 화려함이 남아 있네요^^

공연을 본다고 정신이 팔려 제대로 둘러 보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또 오면되죠 ㅎㅎㅎ

국립한글박물관    NATIONAL HANGEUL MUSEUM     國立한글博物館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 및 한글문화 관련 유물과 자료의 수집·보존·조사·연구·전시·교육 및 교류 등

한글문화의 보존, 확산 및 진흥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소속기관으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9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개관(2014. 10. 09)하여 둘러 볼 기회가 되었네요^^ 

국립한글박물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이뤄져 있으며 건축 총넓이는 11,322㎡ 규모입니다.
1층에는 한글 관련 디지털 정보를 검색하고, 개가식 서적 열람 등을 할 수 있는 '하늘누리'라는 휴게 공간이
2층 상설전시실에서는 '한글을 만들다 → 한글을 꽃피우다 → 한글을 생각하다'라는
3가지 주제로 한글 창제부터 보급 과정, 오늘날 한글 이용 실태까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더군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과 글이지만 그 소중함을 이렇게 다시 보게 됩니다

버섯모양의 모양의 종이에 쓰여진 아름다운 글씨를 한참 들여 다 보았습니다^^

추사 김정희도 한글 편지를 남겼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 되었네요~  한글 추사체라 해야 하나? ㅎㅎㅎ

세계에서 가장 직관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한글. 우리나라 최고의 발명 중 하나라고 손꼽힐 정도로

한글의 우수성은 이미 국내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데요.

이러한 한글에 대해 한글박물관 관람을 통해 좀 더 배우고 한글의 역사와 가치를 일깨워 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글에 대한 자부심을 한층 느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아 보람있었습니다^^


조선 초기 섣달 그믐날, 즉 제야(除夜)의 나례(儺禮) 때 추던 장엄한 의식 절차로,

학무·연화대무·처용무의 3가지를 종합 연출한 춤이라 합니다.

전도(前度)에 처용무를 먼저 추고, 후도(後度)에 청학(靑鶴)과 백학(白鶴)이 나와 춤추다가 연꽃을 쪼아

두 동녀(童女)가 나오면 두 학이 놀라 나가고, 연화대를 춘 후에 다시 처용무를 춘다.

『악학궤범』 에 초입배열도(初入排列圖)와 처용무 오방작대도(五方作隊圖)와 의장(儀仗)을 든

전체 무원이 함께 도는 시종회무도(始終回舞圖)가 보인다.

1) 학무(鶴舞) :무용수가 각각 청학과 백학의 탈을 쓰고 추는 춤.
2) 연화대(蓮花臺) :고려때 들어온 당악 정재의 하나로 ‘석지무’ 라고도 함.
3) 처용무(處容舞) :조선 시대 궁중 정재 때 구나의(驅儺儀)의 뒤에 추는 향악무.

참조 : kocca 문화콘텐츠닷컴

궁중 음악과 무용을 처음 보게 되어 그 감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우아함의 상징인 학이 춤추는 모습이라 합니다~

갑자기 연꽃이 터지면서 나타난 아름다운 동녀[童女]

연화대무[蓮花臺舞] - 고려 시대 들어온 당악 정재() 하나. 미신사() 내용 의하면,

동녀() 봉래()에서 내려와 연꽃술 생겨났다가 군왕() 덕화()

감격하여 가무()로써 즐거움 가져다주려 왔다 한다.  [다음 사전 참조]

화려하지만 절제된 아름다운 춤이더군요^^

처용무[處容舞] - 가면 무용 하나. 신라 헌강왕 처용 설화()에서 비롯된 이다.

궁중에서 나례 의식() 구나() 추던 으로, 처용의 무동()

각기 청색, 홍색, 황색, 흑색, 백색 입고 다섯 방위 벌여 서서 음악이나 노래 맞추어 추었다.

[다음 사전 참조]

시종회무도 [始終回舞圖]



경복궁 흥례문 광장에서 조선전기 호위군 사열의식인 '첩종의식' 재현 행사가 시행되었습니다.

 '첩종(疊鐘)'은 어전 사열 및 비상 대기에 사용됐던 큰 종으로, 국왕의 명에 따라 첩종이 울리면 궁궐에 입직한 군사뿐 아니라 문무백관 및 중앙군인 오위의 병사들까지 모두 집합해 군사 점검을 받는 사열의식이었다.

올해 두번째 방문을 하게 된 경복궁에서 이런 행사를 직접 보는 행운을 얻었네요^^

조선 왕실 호위병들을 재현하여 각종 무기들을 들고 있는 듬직한 모습입니다.

'조선왕조실록', '경국대전'등 문헌의 고증을 바탕으로 재현된 '첩종의식'사극에서 조차 쉽게

볼 수 없었던 조선 전기의 복식과 무기, 의장물을 재현한 볼거리와 전통무예시연을 결합해

관람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34호 강령탈춤 예능보유자이자 영화, 뮤지컬, 드라마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송용태 보유자가 국왕역으로 특별 출연해 더욱 멋지고 좋았습니다.

십팔기보존회에서 무예도보통지 등을 참조해 조선전기 무예를 재현했다고 하며, 

건국초기 강력했던 조선군의 위용을 보여주며, 다채로운 볼거리가 있어 정말 좋더군요^^

특히 올해 진행된 행사에는 복잡한 구성으로 실연해내기 어려웠던 '오위진법(五衛陳法)'을 200여명의

출연자가 직접 펼쳐 보이며, 진과 진의 운영을 통해 그 원리를 보여주고 진을 구성하는 다양한 무기가
어떻게 활용됐는지 전술훈련을 통해 박진감 넘치게 재현해 눈앞어서 보니 더욱 멋졌습니다~

10.26(일)까지 (토요일 14:00 1회, 일요일 10:30, 14:00 2회) 경복궁 흥례문 광장에서

첩종행사가 재현된다니 시간이 되시면 꼭 구경해 보세요~

무술을 하시는 분들이라 자세나 동작 하나하나에 절도가 넘치더군요^^

좀처럼 보기 어려운 행사라 보는 내내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오더군요~

이런 행사를 수시로 하여 많은 국내외 관광객에게 고품격 문화유산 콘텐츠로

우리 선조들의 멋진 모습을 자주 보여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첩종은 군대의 군율을 유지하고 군기를 다스려 국가의 근본을 유지하고자 하는 조선 시대의 중요한 제도로 건국 초기 문무의 조화 속에 국가의 안정을 꾀한 조선왕조의 면모를 보여주는 문치만을 중요시한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무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예시범이라 하지만 실제감있는 멋진 공연이더군요^^

이번 시범행사는 행사기간 중 누구나 관람할 수 있으며, 자세한 사항은 문화재청 누리집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덕궁(사적122호)은 1405년 경복궁 다음으로 지어진 별궁인데,

정궁인 경복궁의 동쪽 방면에 있다 해서 '동궐'이라고도 했습니다.

1997년 12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 세계 유산위원회에서

수원 화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 후원은 태종 때 만들어 진 것으로 임금을 비롯한 왕족들이 휴식하던 곳이다. 후원은 북원(北苑),

금원(禁苑)이라고도 불렀으며, 고종 이후에 비원(秘苑)으로 불렀다. 낮은 야산과 골짜기에 원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꼭 필요한 곳에만 사람의 손을 댄 우리 나라의 으뜸가는 정원입니다.

금천교가 세워지고(1411) 돈화문이 건립되는가 하면(1412) 조선 제9대 성종 때부터는 여러 임금들이

여기서 지내 본궁 역할을 하는 궁궐이 됐다. 

체험학습을 나온 초등학생들을 보니 일본여행시 학생들이 6~8명으로 나누어져 전문 해설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문화재를 관람하는 모습이 너무나 부럽더군요. 우리도 그런 점은 꼭 본받아야 될 것 같더군요~

진정한 체험학습이나 수학여행이라 함은 이렇게 학생들이 우리문화를 하나씩 알아가는 점이 아닐까요^^

1611년 광해군에 의해 다시 지어진 이 궁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으며
인정전, 대조전, 선정전, 낙선재 등 많은 문화재가 곳 곳에 있어 눈길을 끈다.

임진왜란 때 창덕궁은 불에 타고 만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가자 이에 화가 난 백성들이 궁궐을 방화했는 데, 1611년 광해군에 의해 다시 지어진 이 궁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으며 인정전, 대조전, 선정전, 낙선재 등 많은 문화재가 곳 곳에 있어 잘 알려진 궁궐이라 합니다.

저도 이번에 처음 방문한 창덕궁인데 후원을 보는 거라 마음이 급합니다~

그래도 가는 길이니 잠시 들러 담아 보았죠^^

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이 외국의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는 등, 공식적인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입니다.

요로콤 멋진 궁궐을 보며서 마음은 콩밭에 ㅎㅎㅎ

후원을 보겠다는 일념[一念] 하나로 열심히 갔는 데 정말 무식하면 몸이 고생이라고

사전예약제이고, 시간이 부족해 포기하고 다음 기회로... ㅠㅠ

언젠가 꼭~ 부글부글

그래도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인터넷으로나마 후원을 감상해 봅니다.

동궐도  국보 제249호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궁궐그림   576*273

북촌 한옥마을은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의 사이에 위치한 서울의 전통 한옥 거주 지역입니다.

경복궁을 구경하고 북촌한옥마을을 둘러 봅니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전통한옥들이 모여있는 북촌마을은 굽이굽이 미로 같은 골목길 사이로 한옥들과
역사문화자원, 박물관, 공방들이 발길 닿는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한국 고유의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고 알릴 수 있는 코스입니다.

조선 왕조의 두 궁궐 사이에 위치한 이 지역은 예로부터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이름에서
‘북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현재의 가회동, 삼청동, 원서동, 재동, 계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에 한옥보존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한옥마을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해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해지면서 옛터 그래도 한옥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합니다.

현재는 1,200여동으 한옥이 남아 있다고 하네요^^







덕수궁德壽宮은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 시대의 궁궐로서,

대한민국의 사적 제124호이며 면적은 63,069㎡입니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에는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하는 큰 궁궐이었다고 하는 데,

현재 18,635평의 경내에 남아 있는 것은
대한문, 중화전, 광명문, 석어당, 준명당, 즉조당, 함녕전, 덕홍전 및 석조전 등에 불과합니다.

석어당(昔御堂)은 궁전에 지어진 건물 중 전각을 제외한 유일한 이층집입니다.
1904년(광무 8년) 화재 후 중건하였고, 원래의 건물은 석어당은 선조 26년(1593년) 창건했으며,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며 선조(宣祖)를

추모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석어당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1칸인 굴도리집 우진각지붕입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서쪽 끝의 칸에 설치되었고, 2층은 칸막이 없이 넓은 공간으로 구성되었고,
사방에 창을 내었다. 궁내 건물임에도 단청을 하지 않아 가식이 없고 검소하며 소박하여 친근감을 줍니다.

중화전의 뒷태도 멋지네요^^

다른 궁궐과 달리 근대화 정책의 노력으로 1910년 고종 황제의 침전 겸 편전으로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

만들었다.  순종이 황제가 된 후 일본은 1920년부터 덕수궁을 매각하거나 철거하여 원형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훼손 되었다.  최근에 덕수궁 장기 복원 계획이 수립되어 건물들을 복원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국립현대미술관 소속의 국립미술관인 덕수궁 미술관

보통 덕수궁미술관은 석조전 서관을 말합니다.
서관은 동관이 완공된 지 27년 뒤인 1937년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으로 개관했으며,
미술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물입니다. [출처 : Visit Seoul]

기둥 부분은 이오니아식, 건물 내부는 로코코풍으로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건축 양식이라 합니다.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正殿)이다. 보물 819호로 지정되었고, 중화전이 세워진 월대는 상·하월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월대는 3단으로 되어 있다.  1902년에 처음 세워졌을 때는 본래 중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1906년에 단층으로 다시 지었다.  투각곡병과 일월오악그림 병풍 앞에 어좌가 놓이고, 돌마당에는 문무백관의 지위와 위치를 나타낸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원래 중화전 주변으로 회랑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으며 현재 중화문 동쪽에 일부가 남아 있다. [위키백과] 

다시 방문하게 되면 더 여유롭게 덕수궁 돌담길도 걸어 보고 다양한 모습도 담고 싶네요^^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둘러 보려고 하니 전시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네요~  언제 또 오겠죠 ㅎㅎㅎ


서울특별시청서울特別市廳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서울특별시의 행정을 총괄하는 지방행정기관입니다.

옛 서울시청사가  서울도서관으로 활용되는 군요^^  시간이 되면 책 좀 읽고 가련만~

서울시청의 과거와 현재를 이렇게 꾸며 보았습니다^^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백제의 수도였고, 1394년 조선의 수도가 된 이후로
대한민국 정부중앙청사 소재지가 되기까지 600년 이상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습니다.

한반도 중부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최대 도시이자 수도입니다.

신 청사의 내부을 정말 보고 싶었는 데 이번에 원을 풀게 되었네요? ㅎㅎ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유리건물이 자연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니 일단 보기는 좋습니다^^

일요일이라 여유로워 사진을 마음 껏 찍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서울의 상징 '해치' 캐릭터는 서울의 600년 문화역사와 함께한 상상의 동물 '해치'를
형상화한것으로서  정의와 안전을 지켜주고 꿈과 희망, 행복을 가져다 주는 해치의
전통적 의미와 맑고 매력있는 세계도시 '서울'의 비전을 전달하는 새로운 상징으로 탄생되었다.

서울 시민들 위한 멋진 행정을 펼치는 박원순 시장님 좋아하는 정치인 중에 한사람입니다 ㅎㅎㅎ

세월호의 아픔이 이렇게 지속되고 있다는 오늘이 더욱 안타깝기만 합니다.

시청 잔디광장에서 모단체의 행사가 있었지만 시간으로도, 약으로도 치료가 안되는 게 있죠 ㅠㅠ

인터넷 이미지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