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성산(382m) 정상에 있는 김해 천문대

분산성을 둘러보고 온길을 다시 내려 오니 천문대가는 표식이 보여 등산로로 올라 봅니다.

조금 오르니 김해가야테마파크가 보이네요^^

천문대 오르는 길인데 새집 모양의 조형물들이 오르막길의 노고에 여유를 주네요^^

조금 편한한 길도 있어 다음에 가게 되면 준비를 잘해 여유롭게 다녀 오고 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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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시 어방동 일원에 위치한 분산성(盆山城 : 323m)은 사적 제66호로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성의 정상인 

봉화대에 서면 김해시내는 물론이고, 김해평야와 낙동강을 한눈에 내려 다 볼 수 있는 멋진 곳입니다.

모처럼 김해를 찾았습니다. 전부터 분산성을 한번 가야 겠다고 마음을 먹은 거라 실천을 한 거죠 ㅎㅎㅎ

산중턱까지 차로도 갈 수 있다는 데 뚜벅이 체질이라~  

경전철을 타고 김해박물관역에 내려 좀 멀어 보이지만 분산성을 행해 봅니다.

접근성이 좋아 그런지 가족과 연인들의 나들이 코스로도 좋겠더군요. 

성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

위에 보이는 성곽들은 파손된 것을 근,현대에 와서 복원한 성벽이라 합니다.

경전철역에서 한시간 반 이상을 걸어 올라 온 길이라 조금 힘들기도 했습니다.

김해분산성 金海盆山城 - 고대 가야, 사적 제 66호

김해 동북쪽에 위치한 해발 330m의 분산(盆山) 정상부를 감싼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남쪽으로는 김해평야, 서쪽으로는 김해 시가지와 양동산성(良洞山城), 

그 뒤로는 창원 쪽이 한 눈에 보인다. 산성의 대부분은 돌로 쌓은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서남쪽의 험준한 지역은 뾰족하게 솟은 자연암반을 성벽으로 이용하였다.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는 "해은사海恩寺"

해은사에서 목도 축이고 나니 조금 여유가 생기네요^^

정상에 오르니 고인돌유적과 봉수대도 있어 좋았습니다. 

이번에 처음 방문한 분성산성인데 봄에 또 다시 찾고 싶습니다.

김해 경전철을 이용한 김해방문은 정말 편하고 좋은 데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이벤트성 전철외관[터닝메카드]이 눈에 뛰더군요~

도교[道敎]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교조로 하는 중국 고유의 토착 종교.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꾀하는

신선술(神仙術)과 민간 종교가 결합한 토대 위에, 노장사상(老莊思想)과 불교를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으로 유교, 불교에 버금가는 삼교(三敎)의 하나이다. [Daum 한국어사전 발취]

도교하면 상고시대 이래 신성시하던 해와 달, 북두칠성 등 하늘의 신들과 후토와 같은 땅의 신,

용신으로 상징되는 물의 신 으로 우리의 조상들에게 자연스레 받아들여졌던 신앙이라 

그리 낮설게 느껴지지 않더군요^^  

신선처럼 생활하는 것이 큰 미덕으로 여겨졌던 도교~  종교로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 도교가 얼마나 많이 조상들의 생활속에 들어 와 있는 지를 알게 하는 계기가 되더군요

누구나 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현대에도 간절히 원하니  도교가 새롭게 각광 받지 않을까요?

자~  도교 여행을 떠나 볼까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전시라 정말 좋았습니다~

신선이 되는 법
도교에서 신선이 되기 위한 방법을 사사약과 같은 인체 외부의 물질에 의존하는 외단(外丹)과, 수련으로 인체 내에
생명의 기운을 축적하는 내단(內丹)d로 크게 나뉜다. 외단은 주사(朱砂)와 납으로 만든 금단(金丹)을 복용한 사람들이
잇따라 중독사하면서 송대(宋代) 이후에는 쇠퇴해 갔다. 우리나라 내단 수련의 전통은 9세기 당나라에 유학한 최승우,
승 자혜 등에서 비롯된다고 하는데, 이것이 꽃을 피운 것은 조선시대였다. 조선시대에는 전무적인 내단 수련가가 아니더라도
퇴계 이황처럼 건강을 위한 내단 수련을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도교 의학의 입방은 이러한 내단 수련의 원리와 그 맥을
같이 하였으니, 『동의보감(東醫寶鑑)』은 그 대표적인 성과였다.

도교에서는 아무리 불사약을 먹거나 수련을 하더라도, 윤리도덕을 지키지 않으면 신선이 될 수 없고 수명도 그만큼 짧아진다고 생각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러한 가르침을 담은 도교 권선서들이 많이 유포되었다.

신이 된 노자(老子)
노자가 남긴 5천여 자의 가르침을 『도덕경』이라 한다. 노자는 초기도교에서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불리며 최고의 신으로
신격화되었다. 수ㆍ당 이후 최고신의 자리는 원시천존과 옥황상제가 차례로 자치하였지만, 태상노군의 인기는 여전히 높아
삼청(三淸)의 하나로 모셔졌다. 우리 역사에서는 고구려 영류왕 7년(624) 당 고조가 천존상을 보내온 기록이 있는데,
이와 비슷한 시기에 역시 중국에서 만들어진 노군상(老子像) 등 3점의 도교 신상을 감상할 수 있다.

복을 바라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 도교의 신이나 신선들은 복을 비는 대상으로 인기가 있었다. 특히 가장 인기가 있는 이른바 팔선(八仙)이나
서왕모(西王母)의 연회를 그린 그린 그림 등이 조선 후기에 인기가 많았다. 수명을 관장하는 수노인, 장수를 상징하는 동방삭,
학문의 신인 문창제군, 재물의 시닌 관성제군 등도 신선 그림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서왕모의 반도(蟠桃)에서 유래한 복숭아, 신선초라 불리는 영지, 그리고 사슴ㆍ학ㆍ거북을 비롯한 십장생 등은 장수와 복록(福祿)의 상징으로 각종 길상화(吉祥畵)나 일상용품을 비롯한 공예품의 문양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한편 잡귀를 물리치는 신인 종규(鐘馗)는 세화(歲畵)로 그려졌고, 삼시충이 경신일(庚申日)마다 상제에게 사람의 잘못을 고하여 수명이 깎이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경인일에는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우는 풍습도 도교에서 유래한 것이다.

함께 하는 도교 - 도교와 유교, 불교, 그리고 동학
국가적으로 도교를 높이던 고려시대에는 도교적 지식을 갖추고 신선처럼 생활하는 것이 큰 미덕으로 여겨졌다.
도교의 지위가 낮아진 조선시대에도 유ㆍ 불ㆍ도 삼교(三校)의 어우러짐을 형상화한 문학이나 회화 작품이 만들어졌고,
저명하 유학자들은 『도덕경(道德經)』이나 『莊子』를 학문적으로 탐구하기도 하였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사망한 승려의
매지권에 서왕모ㆍ동왕공ㆍ황천(皇天)ㆍ후토(后土)와 같은 도교의 신들이 등장하고, 고려 조선의 불화에서는 도교의 신들이
불법(佛法)의 수호신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19세기 말에 창시된 동학(東學)은 선약(仙藥), 주문, 장생과 같은 도교적 용어나
개념을 통해 백성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파고들었다.

민간신앙과 도교
북두칠성에서 유래한 칠성신, 성곽이나 마을을 수호하는 성황신, 불을 수호하는 조왕신들은 우리의 토착 신앙과 무리 없이
어우러지면서 그 일부가 되어 갔다. 도교문화가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밤하늘의 별자를 관찰하고 숭배하며,
마을이나 성곽, 가정을 지키는 신령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도교의 점복과 부적 문화 역시 복을 구하고 액을 피하려는
우리 고유의 민간신앙과 무리 없이 합쳐지면서 그 일부가 되어 갔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로 중국 고대의 무장 관우(關羽)를
 국가 수호신이자 재물신으로 숭배하는 신앙이 확산되면서 점차 무속화하였다. 특히 19세기 후반 고종 대에는 관우신앙 관련
서적을 많이 간행하는 등 관우숭배를 국가 차원에서 강화하였다.

관우신앙은 20세기에 들어 국가 제사가 중단되면서 힘을 잃었고, 민간에서도 점차 쇠토해 갔다.   박물관 기획전시실

종교적 신앙으로 받아들이기엔 좀 어색하지만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신선들만큼은

부럽고 따라 배우고 싶네요~

신선이 되고 픈 마음을 작은 종이에 적어 봅니다^^

가족과 제자들, 블친 여러분들을 위해 소원의 벽에 염원을 적어 두고 왔습니다 ㅎㅎㅎ


신선이 되는 법
도교에서 신선이 되기 위한 방법을 사사약과 같은 인체 외부의 물질에 의존하는 외단(外丹)과, 수련으로 인체 내에 생명의 기운을 축적하는 내단(內丹)d로 크게 나뉜다. 외단은 주사(朱砂)와 납으로 만든 금단(金丹)을 복용한 사람들이 잇따라 중독사하면서 송대(宋代) 이후에는 쇠퇴해 갔다. 우리나라 내단 수련의 전통은 9세기 당나라에 유학한 최승우, 승 자혜 등에서 비롯된다고 하는데, 이것이 꽃을 피운 것은 조선시대였다. 조선시대에는 전무적인 내단 수련가가 아니더라도 퇴계 이황처럼 건강을 위한 내단 수련을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도교 의학의 입방은 이러한 내단 수련의 원리와 그 맥을 같이 하였으니, 『동의보감(東醫寶鑑)』은 그 대표적인 성과였다. 도교에서는 아무리 불사약을 먹거나 수련을 하더라도, 윤리도덕을 지키지 않으면

신선이 될 수 없고 수명도 그만큼 짧아진다고 생각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러한 가르침을 담은
도교 권선서들이 많이 유포되었다.

물질만능주의에 갇혀사는 현대인들에게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속에세 살고 싶은 마음으로

道敎思想은 새롭게 재조명되는 것 같습니다.

가까운 김해박물관에서 도교라는 하나의 주제로 한국의 도교문화이 열려 찾게 되었습니다.

신선처럼 살기는 어렵겠지만 흉내를 내며 사는 것도 멋진 삶 아닐까요? ㅎㅎㅎ

하늘, 땅, 물의 신
상곳대 이래 신성시하던 해와 달, 북두칠성 등 하늘의 신들과 후토(后土)와 같은 땅의 신, 용신(龍神)으로 상징되는 물의 신 등이 중요한 도교의 신으로 수용되었다. 오랜 옛날부터 하늘, 땅, 물을 신성시하던 우리나라에서도 큰 무리없이 이들 도교의 신들을 받아들였다. 백제 무령왕릉 출토 매지권이나, 고려 승려의 매지권에 등자아는 후토신, 고려의 석관에 새기거나 고려ㆍ조선의 국가적 제초에서 받들던 각종 별자리신, 그리고 고대 이래로 그것에 비를 빌거나 해상 운항의 안전을 기원하던 용신 등은 그러한 사례들이다. 전시에서는 이러한 신들을 보여 주는 거울과 목간 및 각종 진단구 등을 볼 수 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칠성님전 비나이다. 우리나라 국태민안, 우리부모 수복강녕, 우리자식 과거급제. 옥황상제, 태상노군, 관성제군, 문창제군, 후토용신, 성황신, 조왕신… 굽어살피소서.” 새벽마다 정한수 떠놓고

일월성신 축수하고, 절기따라 용왕신, 성황신, 조왕신, 측신에게 치성드리던 선조님들이 그립네요~

삶이 너무나 힘들고 간절히 소원을 빌고 싶을 때 정한수 한그릇에 정성을 드리던 외할머니도 생각납니다.





신선세계를 꿈꾸다
고려시대 이래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현실 속에 신선세계를 구현하여 탈속적인 분위기르 조성하려는 기풍이 확산되었다. 정원에 가산(假山)을 만들어 이를 감상하는 일, 자연 속에서 바둑을 두는, 산수화를 그리고 감상하는 일, 산수(山水)나 신선에 대한 시를 짓거나 읽는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신천처럼 하늘을 날며 도술을 부리는 여웅의 이야기들이 소설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누렸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비롯한 영웅소설의 주인공들은 옥황상제나 용왕, 신선, 도사 등의 도움속에 신이한 도술을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한다. 이러한 소설들은 억눌린 현실에서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많은 사람들의 욕망을 반영한 것들이었다.

나라에서 지내는 道敎제사
도교의 신들에게 올리는 제사를 재초(齋醮)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중기까지
국가 차원에서 재초를 거행하며 왕실과 나라의 안녕과 재난의 소멸 등을 기원하였으나,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시대에 와서 이런 재초가 크게 축소되었다. 그나마 16세기에는 조선의 왕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이 명분에 맞지 않는다는 조광조 등의 주장에 따라 그 동안 재초의 명맥만 잇고 있던 소격서마저 폐지와 복구의 진통을 겪다가 16세기말에 완전히 폐지되기에 이른다.

신선의 세계, 동천복지(洞天福地)
도교에서 신선들이 사는 곳을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낙원이었다. 곤륜산에는 도교 최고의 여성 신선 서왕모가 사는데,  그의 과수원에서 3천 년마다 한 번 열리는 복숭아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발해(渤海) 동쪽에는 방장산, 영주산, 봉래산 등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이곳에는 불사약이 있고 신선들이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세기경의 낙랑 무덤과 5세기 무렵 고구려 무덤 벽화에 서왕모가 보이며, 조선후기에는 서왕모가 베풀었다는 연회를 묘사한 회화들이 많이 그려졌다. 그런가하면 백제나 통일신라의 왕실 원지(園池)에 삼신산을 조성하거나, 백제의 왕실 향로와 같은 신산(神山)을 표현한 예들이 있다.



 수로왕비릉 [首露王妃陵] - 허황옥 왕비릉
사적 제74호. 무덤의 지름은 약 16m, 높이는 약 5m. 능은 대형의 원형봉토분으로 특별한 시설은 없고,
주위에는 범위를 넓게 잡아 얕은 돌담이 돌려져 있다. 앞쪽에는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고 능 앞에
'가락국수로왕비진주태후허씨지릉'(駕洛國首露王妃晋州太后許氏之陵)이라고 새긴 능비가 서 있는데,
이러한 시설물은 1647년(인조 25) 수축 때 세운 것이다. 수로왕릉과는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으며,
왕릉에 비하면 시설이 빈약하고 수로왕비릉이라는 확증은 없으나 오래 전부터 구전되어오고 있다.

 

 왕비 허황옥(33~189년)은 고대 인도 아유타국 사람이다.
'역사 최초 국제결혼'이라는 이곳 사람들 얘기도 재밌지만, 학자들은 고대 가락국이 인도까지 교류했다는 점에 더 주목한다. 허황옥과 동행해 남방불교를 전했다는 오빠 장유화상 흔적은 김해에 있는 절 몇 곳에 전설로 남아있다. 신어산에 있는 은하사와 동림사, 불모산에 있는 장유사 등이다.

 

 파사석탑(婆娑石塔)이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서기48년에 수로왕비가 인도에서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해
배에 싣고 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수로왕비릉 [首露王妃陵] - 허황옥 왕비릉

 

 

수로왕비릉에서 뒷편으로 올라가면 작은 야산이 구지봉이다.

구지봉은 가락국 건국신화에 나오는 서사시 '구지가(龜旨歌)'가 불린 곳이다.

 가야시대 대표적인 조개무덤으로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던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가 합쳐져 사적 제2호로 지정된 유적지로 가야시대 포구와 생활촌이 복원되어 있다.

 

 

 

 

 

 

 김해 경전철을 타고 가면 김해의 역사를 둘러 볼 수가 있습니다^^

 

 김해 도심 속의 쉼터 김해 연지공원

 김해 내외동에 조성된 연지공원은 팽나무 등 각종 고목과 분수 및 수변공원 등
다채로운 조형물이 조화를 이루면서 많은 시민이 드나드는, 명실상부한 시민 휴식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주위에 벚꽃이 하나둘씩 피고 있어서 완연한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놀이터는 역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해야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부산 사상에서 김해까지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경전철입니다^^

 2량이라 타는 즐거움도 있죠?ㅎㅎㅎ

 

 김해공항 국내선이 보입니다~

버스로는 한시간이 넘게 걸리는 데 금방이더군요? ㅎㅎㅎ

 이번 목적지가 김해 건설고등학교라 박물관역에 하차합니다.

 2번 출구로 나가 김해교육청 방면으로 10m 정도 걸어가면 김해건설고가 있습니다.

 다양한 조형물도 담아보고...

일정 : 김해건설고등학교-> 대성동고분 ->수로왕릉 -> 김해한옥체험관

 수로왕릉 근처에 한옥체험관이 있어 둘러 보았습니다.

 

 

 작은 규모지만 그래도 전통 한옥을 둘러 볼 수있어 좋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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