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昌慶宮 은 서울시에 있는 조선 성종 때에 건축한 궁궐이며,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창경궁 昌慶宮 Changgyeonggung  -  종로구  -  서울특별시

조선 시대에는 창덕궁과 함께 동궐이라고 하였는데,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붙어 있으면서

서로 보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창경궁의 원래 이름은 수강궁으로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것입니다.

일제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구실 아래 식물원과 동물원을 창덕궁 바로 옆인 창경궁에 설치했다.
즉, 국사는 자기들한테 맡겨두고 진기한 동식물이나 구경하며 소일거리로 삼아라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공사가 시작되자 화려하고 웅장했던 전각ㆍ궁장ㆍ문루 등이 헐리기 시작해 그 모습을 보고 눈에 거슬린

순종이 공사를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이미 정부 요직을 친일 매국노들이 장악하고 있던 터라

어명은 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때 일제가 헐어버린 전각은 무려 60여 채에 달했는데, 거기서 나온 부속물은 모두 경매로 팔려나갔다.

그 후 일제는 대궐 북쪽으로 잇닿은 춘당대 쪽에 식물원을, 종묘와 인접한 보루각 자리에 동물원을 각각

지었다. 또 영화당 옆의 과거 응시장은 춘당지라는 연못으로 만들고, 바로 옆의 임금이 매년 농사를 짓던

전답 자리는 연꽃이 피는 소춘당지로 만들었다.

1909년 11월 1일 오전 10시, 연미복 차림의 예복을 입은 순종을 비롯해 문무백관 및 외국 사신들까지 참석한 동식물원 개원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날 개원식에는 무려 1천명에 달하는 축하객이 참석했는데, 이 행사가 순종으로서는 대한제국 황제 폐하로서 베푸는 마지막 대잔치가 되고 말았답니다.

이때 전시된 동물은 포유류 29종과 조류 43종 등 총 72종 361마리였다. 이로써 창경궁 동물원은 19세기 이래 설립된 동물원 가운데 36번째이자 아시아에서는 7번째로 문을 연 동물원이 되었는 데, 당시 입장료는 어른

 10전, 어린이 5전이었으며, 개원 첫해의 관람객 수만 1만5천명이었고 이듬해에는 11만명에 달했다.

창경궁에 있는 대온실인데 그 당시 건물이라 하니 고풍스럽게 보입니다.

창경궁을 찾은 이유는 궁궐 구경보다는 식물원이 잘 되어 있어 다양한 꽃을 구경하기 위함이였죠^^

마침 7월에는 무료 관람기간이라 더 좋았다고나 할까요? ㅎㅎㅎ

옛 모습을 다시 찾고 있으니 많은 사랑을 받는 궁궐로 지난 날의 영광을 찾게 되겠죠~

춘당지의

 인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두분 형님들과 시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昌德宮 演慶堂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를 위해 지어었는 데,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쯤에

새로 지은 것입니다.  사대부 살림집처럼 꾸몄으며 왕의 사랑채인 연경당과 서재인 선향재를 비롯하여

120여 칸 규모였습니다.

후원을 둘러 보고 나가는 길에 드른 연경담 돌담길이 더욱 운치가 있네요^^

연경당의 정문인 장락문입니다.  장락문을 지나 장양문에 들어서면 연경당의 마당이죠^^

연경당 사랑채 안마당의 구성은 누마루와 대청, 온돌방으로 구성된 사랑채와 서책을 보관하던 중국풍의

건물인 선향재[善香齋], 그리고 선향재 뒷편 높다란 단을 쌓은 곳에 하엽동자로 난간을 두른 농수정[濃繡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편 연경당 안채는 연경당 사랑채와 담하나를 두고 연결되어 있지만 별도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안채의 뒤편에는 음식을 저장하고 조리를 하던 부엌과 광이 딸린 반빗간이

통벽문과  통해 있습니다.[출처 : 문화배움터]

연경당 옆의 건물은‘향기가 좋다’란 뜻의 선향재[善香齋]입니다. 여기서 좋은 향기란 바로 책의 향기를

말한다고 합니다.  처음 보았을 때는 왠 서양식 건물이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선향재는 그 이름답게 책을

읽고 보관하는 곳인데, 그래서 따로 동판으로 지붕을 내어달아 햇빛을 막고 있습니다.

이 동판 지붕 밑에 정자살로 짜여진 문짝으로 차양을 달고 이를 조절할 수 있게 끈을 달아 놓았으며,
동판 위쪽을 쳐다보면 이 차양을 올리고 내릴 때 쓰는 도르래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차양은 햇살이나 비, 바람을 막아 주는데, 이런 구조가 이미 신라의 황룡사 금당에도 있었음이

황룡사 발굴조사에서 입증되었다고 합니다. [출처 : 인터넷 자료 참조]

안채에서 안방을 들여다보면 사랑채까지 공간이 쭉 이어진 것을 볼 수 있는 데, 한옥의 특징 중에 하나가

‘개방성’입니다. 장지문을 열고 닫는 것으로 방이 생기기도 하고 벽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

개방적인 한옥의 구조인 것을 잘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어디서나 시원스럽게 문들이 다 열려 있어 좋았는 데 기왕 가구들도 배치가 되어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밖에서 보기엔 사랑채와 안채가 내외담을 통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만 안에서는 이렇게 다 통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내외담을 ‘헛담’이라 부르기도 한다네요^^

근디 어느 방에서나 문만 열면 옆방과 마당을 볼 수 있는 구조가 정말 좋게 보이는 데 겨울엔 ㅎㅎㅎ

창문 고리가 인상적이라 담아 보았습니다~

이번 서울 궁궐여행을 이렇게 다양하게 보았지만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한 궁궐들인 창경궁, 경운궁, 경희궁,

종묘, 사직 등을 언젠가 다 둘러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너무나 자랑하고 싶은 우리의 문화유산이라 꼭 찾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지도는 조선 후기에 김정호(金正浩)가 1824~34년에 그려서 목각(木刻)한 서울의 지도목판인

보물 제853호인 수선전도(首善全圖)입니다. [출처 : 궁궐길라잡이]

창덕궁(사적122호)은 1405년 경복궁 다음으로 지어진 별궁인데,

정궁인 경복궁의 동쪽 방면에 있다 해서 '동궐'이라고도 했습니다.

1997년 12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 세계 유산위원회에서

수원 화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 후원은 태종 때 만들어 진 것으로 임금을 비롯한 왕족들이 휴식하던 곳이다. 후원은 북원(北苑),

금원(禁苑)이라고도 불렀으며, 고종 이후에 비원(秘苑)으로 불렀다. 낮은 야산과 골짜기에 원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꼭 필요한 곳에만 사람의 손을 댄 우리 나라의 으뜸가는 정원입니다.

금천교가 세워지고(1411) 돈화문이 건립되는가 하면(1412) 조선 제9대 성종 때부터는 여러 임금들이

여기서 지내 본궁 역할을 하는 궁궐이 됐다. 

체험학습을 나온 초등학생들을 보니 일본여행시 학생들이 6~8명으로 나누어져 전문 해설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문화재를 관람하는 모습이 너무나 부럽더군요. 우리도 그런 점은 꼭 본받아야 될 것 같더군요~

진정한 체험학습이나 수학여행이라 함은 이렇게 학생들이 우리문화를 하나씩 알아가는 점이 아닐까요^^

1611년 광해군에 의해 다시 지어진 이 궁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으며
인정전, 대조전, 선정전, 낙선재 등 많은 문화재가 곳 곳에 있어 눈길을 끈다.

임진왜란 때 창덕궁은 불에 타고 만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가자 이에 화가 난 백성들이 궁궐을 방화했는 데, 1611년 광해군에 의해 다시 지어진 이 궁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으며 인정전, 대조전, 선정전, 낙선재 등 많은 문화재가 곳 곳에 있어 잘 알려진 궁궐이라 합니다.

저도 이번에 처음 방문한 창덕궁인데 후원을 보는 거라 마음이 급합니다~

그래도 가는 길이니 잠시 들러 담아 보았죠^^

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이 외국의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는 등, 공식적인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입니다.

요로콤 멋진 궁궐을 보며서 마음은 콩밭에 ㅎㅎㅎ

후원을 보겠다는 일념[一念] 하나로 열심히 갔는 데 정말 무식하면 몸이 고생이라고

사전예약제이고, 시간이 부족해 포기하고 다음 기회로... ㅠㅠ

언젠가 꼭~ 부글부글

그래도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인터넷으로나마 후원을 감상해 봅니다.

동궐도  국보 제249호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궁궐그림   576*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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