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항아리 이야기 ]

달항아리는 17,18세기 경기도 광주 금사리가마와 분원가마에서 만들어진 백자를 말한다.
대부분 높이가 40㎝ 이상이어서 백자대호라고도 한다. 원에 가까운 형태가 둥근 달처럼 보이기도 하고

바닥에 닿는 굽이 입보다 작아 달이 둥실 떠 있는 것 같아서 달항아리라고 부른다.

몸체가 크기 때문에 물레질로 점토를 끌어 올려 한 번에 형태를 빚을 수 없고 상층과 하층을 따로 만든 뒤

두 부분을 접합시켜 완성한다. 따라서 달항아리는 대부분 이음새가 나타나는데 정교하게 다듬지는 않는다. 심하게 이지러진 것도 있는데 기교에 집착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깊은 맛을 낸다. 
- 오마이뉴스 고진숙기자 / 우리 도자기 역사

지극히 평범하고 꾸밈이 없어 더 아름다운 조선의 백자, 더 나아가 한국미의 극치로 손꼽히는
백자 달항아리의 미학은 당시 조선의 시대상을 통해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17세기 조선 왕조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중화 中華에 대한 회의와 자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일기 시작한다. 조선 사대부들의 정신적 지향점이었던 명나라가
멸망하고 지금껏 오랑캐로 천시하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국의 주인이 되어버리자
가치관과 세계관의 혼란을 겪게 된다. 삶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던
이들이 찾아낸 답은 ‘중국은 우리다, 조선이 중국이다’였다.
중국이 우리라는 것은 곧 우리 안에 진리가 있다는 것.

18세기 영·정조가 재위하며 문화를 꽃피웠던 시기에 백자 달항아리가 등장한다.

당시 중국은 청화 백자 위에 삼채, 오채, 칠채로 화려한 채색 자기를 만들고 일본은 이를 따라 채색 자기를 만들어 유럽에 수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모두 오랑캐 짓이라 여긴 조선은 그 반대급부로

날렵한 성형이나 요란한 기교 없이 자연미로 가득 찬 순백자를 선택한 것이다.
이를 두고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과 그 예술>에서 “동서를 막론하고 시대가 내려오면 기교가 복잡을

더하는데 그 예외를 찾을 수 있으니 바로 조선의 도자기 공예다. 그 아름다움은 오히려 단순으로의 복귀”

라고 표현했다. 18세기 백자 달항아리는 우리 선조들의 자연관과 예술성을 바탕으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탄생한 조선 문화의 백미인 것이다.  - 인터넷 참조

조선 백자의 백미, 백자대호 白磁大壺
朝鮮白瓷의 美는
이론을 초월한 白衣의 미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 마시오.

원은 둥글지 않고, 면은 고르지 않으나
물레를 돌리다 보니 그리 되었고
바닥이 좀 뒤뚱거리나 뭘 좀 괴어놓으면
넘어지지야 않을 게 아니오.

조선 백자에는 허식이 없고  山水와 같은 自然이 있기에
보고 있으면 白雲이 날고  듣고 있으면 종달새 우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는  白衣의 民의 생활 속에서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古今未有의 한국의 미

여기에 무엇 새삼스러이  이론을 캐고 를 따지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끼지 않는다면 아예 말을 맙시다.
- 삼불 김원용 선생 작 ‘백자대호’

영국의 도예가 버나드 리치는 1935년 달항아리를 구입해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라고 했다지요. 여러분도 보름달처럼 휘영청 밝은 달항아리가

전하는 행복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달항아리에 대한 수 많은 예찬은 많이 들었지만 아직 저에게는 그리 다가 오지 않더군요.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라 늘 채우고자 하는 욕심이 많아 그렇겠죠~

도자기란 흙과 불의 합작품이라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라 여겨집니다.

밝달 여상영의 달항아리전을 통해 다시 조금씩 다가 가 보았습니다.

'밝다'라는 의미의 '밝달'은 높은 산자락에서 혼자 밝은 달과 함께 한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선조들의 숨결이 물씬 풍기는 항아리를 만들기 위한 정신과 때 묻지 않은 그릇을 굽기 위한 고집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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